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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두 사람은 영남대 근처 사택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생활에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국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가족이자, 등하굣길의 말벗이자, 같은 학부에 소속된 스승과 제자가 된 것이다.


 
올 가을 영남대 영어영문학부 신입생이 된 다미뜨(H.W. Damith, 24, 사진 좌). 스리랑카에서 유학 온 그에게는 두 분의 아버지가 있다. 한 분은 스리랑카 남서해안도시인 갤(Galle)에서 살고 계시는 72세의 아버지, 그리고 또 한 분은 영남대 영어영문학부에서 회화와 작문을 가르치는 59세의 미국인 가드너(Graig Gardner, 사진) 교수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약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사파이어 가공무역업 분야에 종사하다가 개인적 아픔을 겪은 뒤 봉사활동에 투신하게 된 가드너 씨가 미국평화봉사단(US Peace Corps)으로 첫 파견된 곳이 스리랑카였고, 그 곳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유달리 그의 눈길을 끈 한 어린이가 다미뜨였던 것.

“유난히 검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지닌 한 꼬마아이가 활짝 웃으며 다가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스스럼이 없었던 다미뜨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닌 아이였고 정말 총명했다. 다미뜨 덕분에 힘들거나 괴로운 일들도 다 잊을 수 있었다”며 가드너 씨는 당시 다섯 살배기 꼬마 다미뜨를 기억했다.

3년 뒤 귀국한 뒤에도 그는 다미뜨와의 연락을 계속했다. 스리랑카에서도 유난히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다미뜨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맏형과 21살 터울이 나는 다미뜨는 7남매 중 막내다. 그런 그에게 대학진학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다미뜨는 가드너 씨의 도움으로 2006년 네덜란드로 배움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다미뜨는 네덜란드에서 어학연수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틈틈이 대학 강의를 청강했다. 대학진학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안 가드너 씨는 또 한 번 다미뜨에게 배움의 길을 터주었다. 2006년부터 영남대 영어영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가드너 씨가 다미뜨에게 한국 유학을 권했던 것. 덕분에 다미뜨는 2008년 12월 영남대 한국어교육원에 입학했고, 반 학기 만인 지난 6월 한국어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된 것이다.

현재 두 사람은 영남대 근처 사택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생활에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국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가족이자, 등하굣길의 말벗이자, 같은 학부에 소속된 스승과 제자가 된 것이다.

졸업 후 스리랑카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취직해 한-스리랑카 교류를 활성화하는 가교가 되고 싶다는 다미뜨는 “가드너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제가 어떻게 한국까지 와서 대학생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나탈파파(스리랑카어로 ‘산타크로스’)처럼 제 인생에 큰 선물을 주신 가드너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가드너 씨는 “그 배우기 어려운 한글을 겨우 반 년 만에 익히고, 이렇게 당당하게 대학생이 되어준 다미뜨가 얼마나 대견한지……. 제게 이런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기쁨을 준 다미뜨가 오히려 고마울 따름입니다”라며 “요즘 스리랑카로 진출하고 있는 한국기업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한국어와 한국문화도 잘 알고 영어까지 능통한 다미뜨는 그야말로 한국기업에 꼭 필요한 존재일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영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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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 오코노미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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