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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으신 님의 우국충정, 오롯이 받들겠습니다”
구국의 혼, 왕산선생 애국충절 기리는 기념관 완공 
- 9월 28일 오전 11시 국내외 유족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 가져
- 고향인 구미 임은동에 9,717㎡ 지상 2층 건물로 세워져
- 애국의 발자취 느낄 수 있는 추모의 장, 전시실, 영상관 등으로 구성
- 우국충정 본받을 수 있도록 도서자료실과 어린이열람실 마련
- 꺾이지 않는 불굴의 민족혼 배우고 추모하는 애국의 산실 기대

 
일제식민지시대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던져 항일운동을 했던 의병들 사이에서도 그 행적이 유난히 빛났던 왕산 허위선생의 기념관이 드디어 완공됐다.

오는 9월 28일 (오전 11시)구미시 임은동 왕산기념관 현장에서 갖는 개관식에는 남유진시장과 김관용경상북도지사 등 지역의 각급 유관기관자치단체장 및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또한 유족으로는 선생의 손자인 허로자씨(우즈베키스탄)와 허브로코피, 허클라라, 증손녀인 김빠찌아나(러시아), 손자인 허게오르기와 허블라디슬라브(키즈키르스탄) , 허경성, 허도성, 허순옥씨 등이 참석한다.

왕산기념관은 선생의 고향인 구미시 임은동에 부지 9,717㎡, 건축연면적 1,950㎡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세워졌으며 총 사업비 39억 4천만 원이(국비 12억 3천6백만 원, 도비 4억 원, 시비 23억 4백만 원) 투입됐다.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건립됐으며 지상 1층은 추모의 장, 전시실, 영상추모관, 기획전시실, 훈장실 등이, 지상 2층에는 시청각실, 도서자료실과 어린이열람실, 성인열람실이 들어서 있다.

로비 중심에는 내방객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선생의 흉상이 서있고 전시관 내에는 왕산선생의 장손자인 허경성씨가 보관하고 있던 선생의 건국훈장 1점을 비롯해 병풍 2점, 교지 15점, 만장 25점, 사진 4점, 도서 4점 등 각종 유품과 자료 총 6종 51점이 전시돼 있다.

2층에는 각종 세미나와 연구발표를 할 수 있는 시청각자료실을 비롯해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이 마련돼 있는데 특히 어린이열람실을 둠으로써 청소년들이 공부도 하고 왕산허위선생의 숭고한 우국충정과 위업을 자연스럽게 본받을 수 있도록 했다.

남유진 시장은 “왕산 허위선생의 발자취는 충절의 고장인 우리 구미시를 더욱 빛나게 했다”며 왕산기념관이 꺾이지 않는 불굴의 민족혼을 배우고 추모하는 애국의 산실로 자리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왕산기념관은 선생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숭고한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5년 뜻을 같이한 지역 인사를 중심으로 왕산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노진환 사단법인 영남유교문화원장을 회장으로 추대한 가운데 추진해왔으며 사단법인 왕산기념사업회(이사장 김교홍)에서 위탁․운영한다.

한편 왕산기념관 맞은 편 생가터에는 지난 2007년 7월 개장한 왕산기념공원이 있으며 금오산에서 옮겨온 유허비가 기념관 옆에 자리하고 있다.

* 구국의 혼으로 다시 살아난 왕산 허위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의병장 왕산 허위선생은 1855년 4월 2일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충절과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가통을 이어받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그 재주가 남달라 15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제가백가서를 통달했다. 천문, 지리, 산수 등에도 조예가 깊었고 효성 또한 지극했다고 한다.

선생이 40대에 접어든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이듬해인 1896년 3월 10일 김천장날을 기해 의병을 규합하고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899년 3월에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벼슬길에 나가 5년간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1905년 외교활동을 위한 비밀독일방문 계획이 실패되자 일본의 만행규탄 격문을 살포해 4개월간 투옥된다. 이후 벼슬을 그만 두고 김천 지례로 들어가 은거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과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경기의병대장으로 활약한다.

1908년 전국 13도 의병장과 연합한 13도연합의병창의군을 결성하고 일본 통감부를 격파하기 위해 의병 300명과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했으며 밀고로 경기도 연천에서 체포된다.

그해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로 순국했다.
선생이 서울에 진격하며 일본군과 싸웠던 서울 청량리와 동대문 사이의 길을 ‘왕산로’라 칭하고 1962년 10월에는 대구 달성공원 내에 선생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왕산 허위선생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형인 허훈은 당시 땅 3천마지기를 팔아 군자금으로 기부했으며 허겸은 허위와 함께 의병투쟁에 참가하다 1912년 만주로 망명했다.

형제인 허학도 의병에 참가했으며 아들인 허국과 사촌인 허발, 허규도 항일투쟁 혐의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사촌 허필의 아들인 허형식(본명 허극)은 만주에서 유격대 활동을 하며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등을 역임하다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전사했다.

또한 항일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시인(본명 이원록)은 허형의 딸인 허길의 아들로 항일운동가로서 활약하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썼다.

이처럼 소위 왕산가로 불리는 허위집안은 항일투쟁의 기치를 올렸던 일가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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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 오코노미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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