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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닝 = ‘고반(顧盼)’, 대리시험= ‘차술(借述)

~·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부정과 처벌 ·~ 대검찰청 기록연구사 이 현 정

임금이 직접 하사한 어사화를 사모에 꽂은 채 3일 동안 장안 곳곳을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장원 급제자. 뭇사람들의 부러움과 축하의 물결 속에 그동안 자신이 합격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을 방문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잠시 후 동네에 도착한 급제자는 합격증서인 홍패를 높이 들고 부모와 일가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국가에서 보낸 악대가 도착하여 풍악을 울리며 성대한 축하 잔치의 흥을 돋우고....

윗 글과 그림은 과거 급제자가 삼일유가(三日遊街)와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종류의 과거가 있었으며, 몇 년마다 한번 실시되었을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과거 제도는 고려 광종 이후 실시된 제도로서,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평가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인재등용 방식을 말합니다.

조선시대 과거의 종류로는 문과와 무과, 그리고 잡과가 있었습니다. 이는 조선 왕조에 필요한 문신, 무신, 그리고 기술관을 뽑는 시험이었죠. 이 세 시험은 모두 3년마다 정기적으로 보는 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있었습니다. 부정기 시험은 선발 인원이 제한되지 않았습니다만, 그 횟수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식년시가 중요했는데, 식년시는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를 거쳐 최종 28명을 선발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거가 조선시대 양반이 출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또 3년에 28명 정도만 합격하는 매우 경쟁이 치열한 것이었기 때문에 부정행위가 많이 저질러졌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부정행위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을까요?

첫째, 수험생의 초보적인 부정행위가 있었습니다. 고반(顧盼)이 그것입니다. 고반이란 눈동자를 굴려 사방을 둘러보면서 남의 답안을 훔쳐보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응시자 개인의 의도적 부정행위가 있었습니다. 의영고(義盈庫)과 협서(挾書)가 그것입니다. 의영고는 커닝 페이퍼를 콧속에 숨겨 놓았다가 시험장에 들어가서 펴보는 것을 말하고, 협서는 책이나 작은 종이를 붓대 끝에 숨겨 들어가서 몰래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응시자와 응시자 간의 의도적 부정행위가 있었습니다. 설화(說話)와 낙지(落紙), 환권(換券), 차술(借述), 이석(移席) 등이 그것인데요. 먼저 설화는 옆사람과 은밀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고, 낙지는 답안지나 초고지를 일부러 땅바닥에 떨어뜨려 옆사람에게 답안을 보이게 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환권은 옆에 앉아 있던 사람과 시험지나 이름을 바꾸어 제출하는 부정행위를 뜻하고, 차술은 남의 답안을 베끼거나 대리 시험을 보는 것, 이석은 응시자가 과거를 보는 동안 차를 마시거나 소변을 보는 것을 허용하였는데, 이를 이용하여 제 자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옮겨 앉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넷째, 응시자와 외부인 간의 계획적 부정행위도 있었습니다. [숙종실록]을 보면, 한 아낙네가 성균관 앞에서 나물을 캐다가 땅에 묻힌 노끈을 발견하고 잡아당겨보니, 노끈이 대나무 통과 이어져 과거 시험장이었던 성균관 반수당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대나무 통을 길게 매설하고 통 속에 노끈을 넣은 후, 과거장에서 시험문제를 노끈에 매달아 신호를 보내면 밖에 있는 자가 줄을 당겨 시험 문제를 확인한 후 답안지를 작성해 노끈에 묶어 다시 보내려고 했던 것이죠. 이쯤 되면 부정행위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닌’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마지막으로 응시자와 시험관, 혹은 채점관 사이의 부정행위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를 혁제(赫蹄)라고 불렀는데요. 혁제란 시험관과 응시자가 결탁하여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를 의미하였습니다. 즉 출제자를 매수하여 미리 출제 문제를 안 후 예상 답안지를 미리 만들어 가는 것, 채점자를 매수하여 후한 점수를 받거나, 합격자의 이름을 바꿔치기 하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특히 조선후기 권력의 독점이 심해지면서 특정 정파가 자파 세력의 인물에게 일부러 좋은 점수를 주거나 친인척을 뽑는, 구조적인 부정행위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 과거 시험의 부정행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부정행위에 대해 조선 정부는 어떻게 처벌하였을까요?

먼저 정부에서는 책이나 문서를 가지고 과거장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3-6년동안 과거 응시 기회를 박탈하고,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몰래 보다 걸리면 곤장 1백대와 징역 3년에 이르는 강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또한 과거 응시자와 시험관의 개인적 유착을 근절하기 위해 문제 및 채점의 보안은 물론, 응시자의 인적 사항을 별도로 표기하고, 역서(易書)라고 하여 시험관이 과거 응시자의 글씨를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서리가 붉은 글씨로 다시 쓰기도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세종 대에는 다른 사람에게 청탁하여 글을 짓게 하는 사람과 남을 위하여 글을 짓는 사람과 중간에서 서로 통하게 하는 사람은, 장(杖) 1백 개와 도형(徒刑) 3년을 집행하고, 영구히 관직에 등용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리 과거시험 문제를 누설시킨 관원이나 필적을 알고 점수를 후하게 준 채점관, 부정행위를 알고도 고의로 눈감아준 사람도 또한 위의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주고, 영구히 관직에 등용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처벌도 조선후기에는 잘 시행되기 어렵게 됩니다, 그것은 조선후기 양반수의 증가로 인한 과거 응시자 수의 급증과 이에 따른 더욱 치열한 경쟁, 그리고 권력의 독점으로 인한 기강의 해이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구미공단신문뉴스
 
19세기 중엽에 불린 [한양가(漢陽歌)]를 보면 조선후기 과거시험의 장면이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중 다음 한 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집춘문 월근문과 통화문 홍화문에 /
부문(赴門)을 하는구나 건장한 선접군(先接軍)이 /
자른 도포 젖혀 매고 우산에 공석(空石) 쓰고 /
말뚝이며 말장이며 대로 만든 등(燈)을 들고
각색 글자 표를 하여 등을 보고 모여 섰다 /
밤중에 문을 여니 각색 등이 들어온다 줄불이 펼쳤는 듯 새벽별이 흐르는 듯 /
기세는 백전(白戰)일세, 빠르기가 살 같도다
현제판(懸題板) 밑 설포장(設布場)에 말뚝 박고 우산 치고 /
후장 치고 등을 꽂고 수종군(隨從軍)이 늘어서서 /
접(接)마다 지키면서 엄포가 사나울사

처음 나오는 네 문은 창경궁에 있는 문이며, 과거 시험자들이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문이란 과거장에 입장하는 것을 지칭하는데, 문제는 입장하는 사람이 바로 ‘건장한 선접군’이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이 건장한 선접군이란 힘깨나 쓰는 건장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과거를 열심히 준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자른 도포를 젖혀 매면서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고 우산과 빈 자리, 말뚝 막대기 등을 밝히고 문 앞에 서 있다가 시험날 새벽 문이 열리면 안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가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전문 행동대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산과 공석, 즉 빈 돗자리, 말뚝은 햇볕을 가리고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도구이고, 각색표시를 한 등은 자기 팀이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표시를 한 것을 말합니다. 다음의 [소과응시]라는 당시의 그림은 이러한 풍경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행동대원까지 고용하여 과장에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조선시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수험생의 좌석이 지정되지 않았으며, 시험문제도 별도로 주지 않고 현제판, 즉 문제를 적은 판만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적은 판 가까이에 자리를 접는 것이 제일이었던 것이죠. 그리하여 현제판 근처에 자리를 잡으면, 자기 접을 부르고 장막을 치고 자리를 깔며 우산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접이란 한 팀을 말하는 바, 과거 시험장에서 상부상조하기로 약속한, 일종의 그룹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접군들은 이러한 자리다툼에 힘을 쓴 댓가로 돈을 받거나, 아니면 같은 접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남의 글이나 글씨를 빌려 자기 것 대신 답안지를 바치고 합격을 바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밤새워 기다릴 만큼 자리 잡기 경쟁이 치열했고, 또 선접군 같은 행동대원들이 등장했던 이유는 과거 응시자가 조선후기에 크게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우선 영조 15년 알성시에 응시한 자가 1만 7-8천 여 명 이었는데, 정조 24년 3월 24일과 25일 이틀에 걸쳐 경과의 성시 초시에 응시한 수는 21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거의 5배 이상이 늘어난 셈이죠.

이러한 기하급수적인 응시 인원의 증가 속에서 조선후기 과거시험장은 폭력이 난무하는 난장판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18세기 실학자인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그때보다 백 배가 넘는 유생이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오고, 힘센 무인들이 들어오며,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 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수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수 있겠는가? (중략) 온화하고 예를 표하며 겸손해야 할 장소에서 강도질이나 전쟁터에서 할 짓거리를 행하고 있으므로 옛사람이라면 반드시 오늘날의 과거장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 시험장의 질서를 유지하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시 [한양가]의 다음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각각 제 접 찾아가서 책행담(冊行擔) 열어놓고 / 해제(解題)를 생각하여 풍우같이 지어내니
글하는 거벽(巨擘)들은 귀귀(句句)이 읊어내고 / 글씨쓰는 사수(寫手)들은 시각을 못 머문다

윗 글에서 책행담이란 싸리나 버들로 만든 것으로, 휴대용 작은 상자였습니다. 이 속에는 예상 답안지와 참고서적 등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렇게 책을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에 조선후기 실학자 이수광(1563-1628)은 ‘지금 법이 해이해져 드러내놓고 책을 가지고 들어가 과거시험장이 마치 책가게와 같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벽과 사수는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을까요?

거벽(巨擘)은 전문적으로 과거 답안지를 대신 지어주는 사람이었고, 사수는 곧 서수(書手)로서 글씨를 써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벽과 사수를 동원하면 시험 응시자는 작문할 필요도, 글씨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대리시험인 것이죠.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익(1681-1763)은 ‘최근 5-60년 동안 과거응시자들이 시험장소에 들어갈 때 여러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고, 시험장에 들어간 사람 가운데 글을 직접 짓는 사람은 10분의 1 밖에 안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벽과 사수 등과 어울려 한 팀을 이루는 것이 바로 접(接)이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받고 과문(科文)을 대신 지어주었던 거벽과 사수가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19세기말 과거에 참가한 경험이 있던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1892년 해주에서 실시된 마지막 과거 시험장의 풍경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흰 베에 산동접이니 석담접이니 하는 접의 이름을 서서 장대 끝에 매달고 자기 접의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힘있는 자를 앞세워, 큰 종이양산을 들고 도포 입고 유건 쓴 선비들이 접접(接接)이 들어가는 대혼잡의 광경은 참으로 볼 만하였다. 과거장에는 노소 귀천이 없이 무질서한 것이 내려오는 풍습이라 한다. ..... 본접에 와서 보니 선생과 접장들이 글을 짓는 자는 짓기만 하고 글씨를 쓰는 자는 쓰기만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TV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질서정연하고 엄숙한 과거 시험장의 모습은 적어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실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한편 조선후기 과거 응시자들은 답안지를 빨리 제출하려는 일대 경쟁이 벌였습니다. 이렇게 답안지를 빨리 내는 것을 조정(早呈)이라고 하는데, 왜 이렇게 답안지를 빨리 내려고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앞서 말한 과거 응시자의 수 증가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즉 과거 응시자 수가 증가하면서 답안지의 양도 엄청나게 많아져 많게는 7만여 장에 이르는 답안지를 꼼꼼하게 읽어보고 채점하기 어려워졌고, 이에 채점관들이 편법으로 답안지의 앞머리만 훑어보고 채점한 결과 일찍 제출한 답안지 중에서 합격자가 나오는 경향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응시생들도 답안지의 서두만 대충 써서 빨리 제출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실제 정조 21년 실시된 감시(監試), 즉 생원·진사시에서 합격한 답안지는 초기에 낸 3백 장 안에서 거의 다 나왔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조정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답안지를 제출하게 한다든지, 늦게 낸 답안지에서 합격자를 선발한다든지 하는 대책을 마련합니다만, 이러한 폐단을 완전히 개선하지 못합니다. 응시자의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보다도 조선후기 과거 시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시대가 지날수록 과거를 자주 시행해도 권력과 요직은 소수 가문이 차지한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과거를 보는 날 권세가의 자제들이 시정의 노예를 불러 모아 이들에게 자신의 옷을 입힌 후 자기 주인의 시험지를 먼저 올리기 위해 앞 다투어 주먹을 휘두르며, 시험 결과를 보면 대부분 글자도 제대로 분별 못하는 전내 나는 어린애가 장원을 차지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권력의 중심에 드는 가문은 열 개, 넓게 잡아 스무 개가 넘지 않는 세도 정치기였기 때문에 과거의 폐단이 시정되기는 어려웠던 것이죠.

오늘은 이상과 같이 조선시대 과거시험시 부정행위와 그 처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미공단신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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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 오코노미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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