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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에서 르노아르전이 열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한국인에게도 대중적인 호감도가 가장 높은 화가, 르노아르. 우리시대 행복코드와 잘 맞아 떨어진다. 아직 들러보진 못했지만, 필자도 좋아하는 인상주의 작가이다.

 
르노아르와 일상의 삶

시립미술관에서 르노아르전이 열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한국인에게도 대중적인 호감도가 가장 높은 화가, 르노아르. 우리시대 행복코드와 잘 맞아 떨어진다. 아직 들러보진 못했지만, 필자도 좋아하는 인상주의 작가이다. 르노아르가 우리에게 특별히 인기가 있는 이유는 아마 그 어떤 화가도 르누아르만큼 인생의 즐거움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작품에는 어떤 메시지나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시고 춤추는 기쁨이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물랭드라칼레트에서의 무도회>도 그렇고 <시골무도회>도 그렇다.

그러나 르노와르의 그림을 보면 그 ‘그림 자체’는 요즘의 우리 일상과 많이 대비된다. 우리는 힘들어도 모든 것을 긍정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은 행복추구자 이긴 하나, 긍정의 감정이 모든 것을 뒤덮는 ‘콩깍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객관적으로 불행한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에 대해 경외할 수 있다는 것이 또한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뇌의 도파민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 뇌의 성찰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능력을 다시 되새겨봐야 한다.

지금이 무의식의 시대이긴 하나 인간은 늘 의식하고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호르몬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진보되어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가 지금 살아있다면 자신의 무의식 발견만을 추종하고 의식적 문화적 사고과정을 애써 배격하려는 지금의 인간무리들을 어떻게 볼까.

플로우의 심리학자 미하이직센트미하이는 “문제는, 필(feel)을 느끼는 것만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최근의 시대적 흐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장 신뢰하는 것이 ‘본능’이다. 좋은 느낌이 오면 그리고 그 느낌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생겨났다면, 그것은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의 성적관심은 보이지 않는 유전적 부호에 의해서 조절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편익을 위해서 라기 보다는 종족 보전을 위한 유전자의 반사적 반응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행위도 우리의 유전자가 자기의 영속성을 위해서 우리 몸에 집어놓은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에도 새로운 훈련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나만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르노와르 바로 전 세대인 윌리엄 터너의 그림들 속에 나타난 숭고미는 인간과 인간적인 노력의 성과가 자연의 힘에 비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숭고는 18세기에 대중적으로 널리 회자되었던 미학적 개념으로, 낭만주의 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아름다운 것, 회화적인 것이라는 이상적인 것과 대조를 이루는 이 용어는 경외와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작품이나 미술작품을 가르키는데 주로 쓰인다.) 터너의 <눈보라:알프스 산을 넘는 한니발>에 등장하는 군대는 강한 눈보라 아래에서 무너질 듯한 위기의 순간으로 표현되었다. 터너와 동시대 인물인 존 마틴도 <진노의 날>에서 성서의 대홍수사건을 서사적으로 표현하여 대중들의 공포감과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래서 르노아르는 거실벽에 걸어놓고 늘 보고 있을 수 있지만, 터너와 마틴의 그림들은 거실이 아닌 다른 곳에 걸려야 한다. 마음 놓고 즐겁게 바라보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즐거운 것만 추구하게 되면 예술적인 것은 장기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 일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스스로를 관조할 수 있는 힘을 주고,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무한한 능력을 지닌 ‘도구’가 바로 예술의 힘이니까 말이다. 명예와 권력과 품위만을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예술은 그 다른 이면, 몰락과 불편함과 위협과 조롱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예전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닐 때 그랬던 것 같다. 아니 왜 미술시간만 되면 재미없는 그림을 보여주고 거기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일까? 그런데 머리가 커가니 알게 되었다. 인간이 호르몬에 조종당하는 동물이 아닌 성찰하고 반성하는 ‘만물의 영장’이며 그래서 ‘재미없는 그림’을 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들이 인류 진화 과정의 일부분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아마 인생의 고통도 애써 피하기보다는 관조해야 한다는 것을 훈련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르노와르도 말년에 어려운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림은 평화롭고 즐겁다. 자기 인생의 관조능력이 뛰어나다는 반증 아닐까? 이번 주말에는 르노와르전을 꼭 보러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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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 오코노미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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