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공공디자인을 빼놓고 정책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벤치나 간판 등 거리를 채운 각종 공공시설물로부터 건축물과 도시 기반시설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이 디자인의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디자인이 그저 외양을 바꾸는 것이 아닌 우리의 생각과 정서,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인 까닭이다. 대한민국 정책포털 ‘공감코리아’는 연속기획 ‘공간이 사람을 바꾼다’를 통해 ‘디자인 시대’를 살아가는 현 정부의 공공디자인 철학과 정책을 총 12회에 걸쳐 짚어본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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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옛말에 건축이라는 말은 없다. 영어의 ‘Architecture’는 희랍어의 Archi(큰)Techne(지혜/기술)에서 온 말이라고 하지만 19세기말 일본인들이 영어를 번역할 때 단순히 ‘세우고 구축한다.’라는 뜻인 건축(建築)으로 번역해서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진정한 건축이라는 말에 합당한 우리의 옛말에는 아키테크네(Architechne)와 같은 뜻인 조영(造營)이 있다. 풀어 말하자면 ‘궁리해서 (지혜로)짓는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큰 지혜로 짓는다’는 대조영(大造營)이야말로 오늘날의 건축에 합당한 말이고 건축사(建築士)로 번역된 Architect는 대조영사(大造營師)로 번역되었어야 그 뜻에 맞는 짝을 이루었을 것이다.
우리 선인들, 큰 지혜와 궁리로 건물과 마을 지어
이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선인들은 건물과 마을들을 큰 지혜와 궁리로 지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나 메마른 지식으로 건물을 만들어 세우고 쌓아올리고 있는 현상을 아무데서나 목격할 수 있다. 땅덩어리는 원래 나누어질 수 없는 연속된 한 몸체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토목공사로 길과 대지를 나누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놓았다.
자연과 길 그리고 건축이 한 몸 한 풍경을 이룬다는 큰 지혜를 잊어버린 채 말이다.
큰 기업의 건물이나 대로변의 건물을 예외로 하고 일반적인 사실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대지에서 건축을 할 때조차도 깊은 궁리를 해서 집을 짓지 않는다.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건폐율과 용적률을 모두 뽑아내서 건물을 지을 뿐이다. 그리고 건물을 짓지 못해 남겨진 땅은 조각조각 나눠진 자투리땅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남겨진 대지에는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의무조경면적을 채우느라 몇 그루의 볼품없는 나무, 실외기나 가스통 같은 것들을 방치해 놓고 있다.
배관들조차 건물 뒤편이나 옆면을 아무렇게나 뚫고 나와 들락거리고 있다. 그리고 전면거리에 노출된 곳에는 붙일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간판을 마구 붙여 놓고 있다.
외국인들 눈에는 이러한 한국의 도시 모습이 “온 국민이 간판에 의한 전위 예술을 하고 있는 도시”로 비친다. 세계의 도시를 소개하는 책자를 발행하는 유수한 프랑스 출판사 ‘오트레망(autrement)사’는 최근 ‘서울’이라는 제목의 도시 소개 책자 표지에 간판으로 뒤덮인 서울의 이면도로 사진을 크게 실어놓았다.
탐욕과 이기심으로만 만든 지금의 건축물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너무 지나치게 와버렸을까. 4천 년의 긴 역사 속에서 다듬어진 단순, 절제, 소박의 미학으로 전세계인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우리 한국인들이 말이다. 그것은 바로 지혜로, 큰 생각으로 건축과 도시를 만들지 않고 오직 탐욕과 이기심으로 건축과 도시를 세우고 구축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몇몇 지방자치단체장들께 건축허가 시 도면 작성을 최소화하는 간편 행정을 펼치더라도 좌우 옆집의 입면도를 같이 그려 넣든지 사진을 몽타주해서 제출하도록 조례로 정하면 건축주와 건축가들이 이웃한 건물과 더불어 조화롭게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될 것이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건물이 대지와 떨어질 수 없듯이, 대지는 이웃 대지와 하나이고 이 대지들은 한 블록을 이루며, 가로에 면한 한 블록은 도로와 하나이고 도로와 블록은 하나의 가구(街區)를 형성하며, 가구들은 지역(地域)을 만들고 지역들은 이윽고 도시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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