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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과는 26년의 긴 세월동안 산업현장에서 주경야독으로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함으로써 얻은 자격증의 결실이라 생각한다. ‘자격증은 나의 경쟁력이다.’ 이 말은 내가 교단에서 즐겨 쓴다. 내가 가르친 기술연수생들에게 “전기의 실무 지식과 기능인의 긍지를 배워 자신의 인생에 삶의 지표로 삼겠다.” 는 말을 들을 때 나는 교사로서 그리고 인생의 선배로서 보람을 느낀다.

 


자격증은 나의 경쟁력

가난의 역경을 딛고 오늘이 있기까지 나는 오직 첫 직장인 현대중공업에서 전기인의 외길만을 걸어 왔다. 전기 기술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야간에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졸업과 동시에 세계 최고의 중공업 회사에 취업을 하였다.

이후로 나는 열정과 오기와 끈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여 공인기술자격 33개를 취득. 현대중공업에서 국가기술자격증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나를 발전시켰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나는 주위의 작은 칭찬에도 자만하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나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세월을 주경야독하며 자격증과의 끈질긴 사투를 벌여 왔다. 그리고 마침내 전기 분야 최고기능인의 반열에 내 자신을 세워 놓았다.

지금의 시대는 우수한 기술과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이 지식기반사회의 주역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나는 지금도 자격증 취득에 열중하고 있다.

공업고등학교에서 전기를 배움
나는 전기 기술자가 되겠다는 신념 하나로 대구의 영남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응시하여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가난한 농촌 소년이 타지에서 자취를 하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 가시는 부모님께 학비에 대한 부담까지 안길 수는 없었기에 스스로 학비를 조달해야 했던 나는 결국 야간부를 선택했고, 낮에는 신문지사에서 신문을 배달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

하루 6시간의 아르바이트로 인하여 피로와 졸음이 쏟아지기 일쑤였지만 수업시간 만큼은 전기 기술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자격증 취득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전기 기능사’ 자격증 2개를 취득하였다. 이 자격증이 나의 평생직장을 얻는데 발판으로 작용하였고, 취업 후 산업체 특례병으로 병역을 면제 받는데도 한 몫을 하였다.

현대중공업에 취업
1982년 1월, 나는 학생의 신분으로 현대중공업에서 시행하는 “공업고등학교 졸업예정자 생산기술직 사원모집”에 응시하였다.
기능사 자격증 소지자로 입사가 제한되어 나는 쉽게 합격될 수 있었다. 나의 첫 직장이자 평생직장이 된 세계 최대의 기업, ‘현대중공업’. 나는 19세의 나이로 졸업 전에 취업이 되는 행운을 얻었고 이곳에서 사회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내가 맡은 일은 선박 안에 전선설치공사를 하는 것이었다.
입사 5년째인 1987년에는 세계적으로 조선불황이 닥쳐왔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조선사업본부에서는 일감 부족으로 인한 구조 조정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룹사인 현대엔진으로 인사이동이 단행 되었다. 그곳에서의 전입 조건은 전기기능사 자격증 취득자를 우대하고 있어 자격증이 없는 사람보다 나는 유리한 입장에서 현대엔진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인사배치는 공장 내에 설치된 각종 산업기계의 전기정비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나에게는 전화위복의 새로운 기회가 되었지만, 이 분야에서는 기술과 경험부족으로 기존 팀원들과는 서열에 밀려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갈등을 겪고 나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 자신의 가치를 올리고 업무능력을 향상하기 위해서 전문자격증을 취득하기로 목표를 세웠다.

자기계발의 집념
내가 33살이 되는 해, 동해안 신년 해돋이를 보며 낮에는 열심히 일하되 밤에는 공부에 전념할 것을 맹세하였다. 1차 목표는 전기공사 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대학 졸업자 수준인 기사 공부는 너무 분량이 많았고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약한 내 의지를 이겨내야 했다. 졸음이 오면 찬물에 발을 담그며 내 자신과의 약속을 다짐하였다. 나의 좌우명인 ‘집념, 도전, 노력’이란 문구를 책마다 적어 놓았고 졸음이 올 때는 이 말을 수차례 반복하며 정신을 다졌다.

첫째, 목표를 위한 강한 집념이 있어야 된다.
둘째, 어려움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
셋째, 노력만이 나의 경쟁력이다.
이렇게 다부진 각오로 도전하여 6개월 동안 꾸준하게 공부한 덕에 첫 번째 응시한 전기공사 산업기사 자격시험에 합격했고, 나는 이로 인해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자기계발에 돌입하게 된 나는 전기 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이어 전기기기 산업기사, 전기 기사, 전기공사 기사 자격증도 취득하였다.

특히 전기공사 기사는 2차 시험에서 무려 여섯 번을 떨어진 후 일곱 번 만에 합격되어 꼬박 2년이 걸렸고, 나의 오기와 의지력을 시험해 보았던 자격증이었다.
다음 목표는 기능인의 최고봉인 기능장이 되는 것이었고, 퇴근 후 공부에 전념하며 다부진 각오로 전기공사 기능장 시험에 도전 하였다.

기능장 합격
1999년 12월12일, 이 날은 나에게 있어서는 평생 잊지 못할 날인 동시에 더 큰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채찍질했던 날이다.
산업인력공단에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제26회 기능장 자격시험에서 수석 합격을 하였으니 보도 자료에 활용될 프로필을 산업인력공단으로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소식에 놀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가 소속된 사무실에도 소식이 전해져 사무실 칠판에는 ‘축 수석합격 김영진’ 이라고 적혔고, 팀원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다음날에는 현대중공업 소식지인 현중뉴스에 이 내용이 톱기사로 보도되어 3만 사우들에게 알려졌다. 이틀 뒤에는 “주경야독으로 기능장 전국수석” 이란 제목으로 MBC뉴스와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에 보도 되었다.

회사에서는 회장님과 사장님께서 축하와 격려 자리를 마련하여 대표이사 표창과 금일봉을 나에게 수여하였다. 또한 인사 가점과 매년 50만원의 기능장 자격수당을 신설하여 기능장들에 대한 새로운 대우를 제도화 했다. 그러나 그날 내가 얻은 것 중 가장 큰 것은 최고의 기능인이라는 자부심이었다.
이런 결과가 있고난 후 나는 기능장 인사가점 덕분에 현장감독자 직급인 기원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현장개선과 봉사활동
내가 근무하던 현장에는 노후 된 생산설비로 인해 개선해야 할 것이 많았다. 나는 자격증을 따면서 익힌 이론을 현장실무에 적용하여 현장 개선에 앞장섰다. 공장자동화를 위해서 범용공작기계를 자동 CNC공작기계로 개선 보완하였고, 천장에 설치된 기계식 크레인을 전자식으로 개선 보완하였다. 작업능률 증대로 인한 생산성 향상으로 연간 5억 5천만 원의 원가를 절감시킴으로써 조금이나마 회사 이익에 보탬이 되었다.

33개의 자격증 획득과 울산시 신지식인
자격증 사냥은 계속되어 전기기기 기능장과 소방설비기사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관련 분야인 전자․ 통신․ 기계분야의 기능사 자격증을 추가로 취득 하였다. 이로써 나는 국가공인 기술자격증 33개를 획득하여 현대중공업에서 제일 많은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기록에 올라 있다. 이런 결과로 인하여 현대 직원에게 배포되는 현대그룹 월간지에는 ‘우수 현대 맨’에 선정 보도 되었다.

나는 지금도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에 정진하며 전자기기 기능장과 통신설비 기능장 자격증 취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13년을 퇴근 후 하루 3시간씩 매일매일 공부해왔다. 회사 내에서는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화장실에 갈 때에도 책을 보는 습관이 되어 있었으며, 회사 동료들과 회식이 있는 날에도 집에 돌아오면 그 날 계획한 공부는 반드시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만들어 실천한 “피로와 졸음과의 싸움에서 이기자” 라는 말을 되새기며 나를 발전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학습에는 나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업에 뜻을 세운 나는 기능장 자격과 기사 자격증으로 인정받은 전공 학점과 6개월간 야간대학에서 취득한 학점을 합하여 학점은행제 시행령에 의한 ‘전기공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하여 교육부장관 명의의 학사 학위를 수여 받고 고등학교 졸업 후 20년이 지난 후에 꿈에 그리던 학사모를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최다 자격증 취득과 부가가치 창출로 인한 공로를 인정받아 울산시로부터 근로자부문 ‘울산시 신지식인’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이런 결과로 ‘현중을 빛낸 우수사원’으로 선정되어 해외여행의 기회를 받아 10일간의 일정으로 동유럽 지역에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직업훈련교사로 후학양성 매진
사내 기술교육원에서는 자격증이 많은 나에게 교사 직무가 더 적임이라며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땀과 노력이 배인 현장과 정든 동료들의 곁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재직근로자와 기술연수생을 대상으로 직업능력개발 교육을 통해 실무지식을 알려줄 수 있다고 판단되어 고심 끝에 수락하였다.

지금 나는 19년 6개월간 때 묻은 작업복과 정들었던 현장을 떠나, 교단에서 기술연수생 양성교육 및 재직근로자 직무교육에서 전기를 가르치는 직업훈련교사로서 내가 배우고 익힌 실무 지식과 자격증 취득의 노하우를 교육생들에게 전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자격증의 필요성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자격증을 따면서 익힌 공부와 현장실무를 바탕으로 공작기계의 전기정비 서적 ‘CNC 보수기술’이란 책자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현대중공업기능장회를 직접 창립하여 활동하면서 작업현장에 학습 분위기를 전파하여 500여 명의 기능장을 탄생시켜 회사의 기술력을 대내외에 과시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리고 2008년 제39회 시즈오카 국제기능올림픽대회 동력제어직종 훈련부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기능올림픽 선수 훈련지도와 교도소 정신교육강사 그리고 울산시 중소기업기술지원단에 기술지도사로 각각 위촉되어 사회봉사활동에도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26년의 긴 세월동안 산업현장에서 주경야독으로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함으로써 얻은 자격증의 결실이라 생각한다. ‘자격증은 나의 경쟁력이다.’ 이 말은 내가 교단에서 즐겨 쓴다. 내가 가르친 기술연수생들에게 “전기의 실무 지식과 기능인의 긍지를 배워 자신의 인생에 삶의 지표로 삼겠다.” 는 말을 들을 때 나는 교사로서 그리고 인생의 선배로서 보람을 느낀다.

우리나라 직업능력개발의 1번지인 현대중공업 기술교육원에서 기술이 필요한 젊은이들에게 열정을 쏟아 내 기술을 전수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인생의 큰 기쁨이다.
더 나은 직업을 위해 그리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자격증 취득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힘과 용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구미공단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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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 오코노미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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