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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너무 울어대니 업고 가던 누나도 울었고, 인민군에게 들킬까 피난길이 불안해지자 대가족을 대표해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하는 수 없다 전체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버리고 가자"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안된다. 막내아들의 금지옥엽인데 나도 버리라"고 하시는 덕에 그 아이도 험한 피난길에서 목숨을 이을 수 있었다.

 
피난시절, 아버지 건빵을 아세요?

6~7월이 되면 유독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우리 가족은 의성군 단밀면 관동에서 군위군 소보면 어딘가로 피난을 갔다. 할머니와 큰아버지네 가족도 함께 있었다.

그때 나는 18개월, 핏덩이는 면했다지만 하나의 인간이라 할 수 없을 때에 당시 8살 된 사촌누나 등에 업혀 먼 길을 떠났다.

밤에 너무 울어대니 업고 가던 누나도 울었고, 인민군에게 들킬까 피난길이 불안해지자 대가족을 대표해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하는 수 없다 전체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버리고 가자"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안된다. 막내아들의 금지옥엽인데 나도 버리라"고 하시는 덕에 그 아이도 험한 피난길에서 목숨을 이을 수 있었다.

그 핏덩이가 이제 예순둘이다.

피난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육군보병으로 붙잡혀갔다. 제주도 훈련소에서 3개월 훈련을 마친 뒤 1950년 10월 미군 군함을 타고 속초 앞 해변에 총알받이로 상륙해 ´콩 볶듯 한다´는 강원도 전투에 참전도 했다.

그렇게 5년을 복무하시고 육군하사로 제대하셨는데, 처음 제주도로 신병훈련을 떠난 단밀면 청년들 12명 가운데 7명은 전사했고, 3명은 상이군인이 됐다. 나의 아버지와 다른 한 분만이 몸성히 돌아오셨다.

어린 기억을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늘 휴가 때마다 건빵을 갖고 오셨다. 얼마나 보고픈 아내와 자식이었겠는가. 한참 후에 아버지는 "온 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건빵을 휴가병들에게 몰아줬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광주사태와 관련해 국가유공자에게 1억을 준다는 소문을 들으시곤 "망할 놈의 나라, 전쟁 치르고 5년이나 복무한 국민은 정작 모른 체 한다"고 불평을 늘어 놓곤 하셨다.

그 후에 정부가 전쟁 치른 대가라며 한 달에 6만원인가를 지급했는데도 아버지는 "광주사태 유공자와 형평이 맞지 않는다"면서 몇 년 동안 그 돈을 쓰지 않으셨다. 한참 뒤 어머니가 "체면이 뭐 그리 중요하냐"면서 그 돈을 쓰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꼬장꼬장하시던 아버지께서 3년 전 82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재향군인회에서는 커다란 태극기를 보내와 "전쟁유공자에 대한 예우입니다"라며 듣지도 못하는 아버지 관 앞에 말씀을 고하고 관위에 덮어드렸다.

어려운 시기, 못사는 농민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그 지긋지긋한 5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자신과 가족, 국민의 귀한 목숨을 지켜낸 아버지.

그렇게 어렵게 살았지만 육남매 잘 길러내시고,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듬뿍 받으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복노인´이라 시샘도 받으며 행복한 노후를 맞이하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6월이 되면 더욱 보고 싶습니다.

( 이인녕 경상북도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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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 오코노미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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